대부분의 동물에게 '괴혈병'은 존재하지 않는 병입니다. 개, 고양이, 소, 심지어 쥐도 스스로 비타민 C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레몬이나 오렌지를 먹지 않아도 잇몸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갈 일이 없죠. 하지만 유독 인간을 포함한 영장류, 그리고 기니피그 같은 몇몇 동물만이 이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차이'가 아닙니다. 생존에 필수적인 물질을 합성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은, 마치 갑자기 날개가 퇴화해버린 새나 아가미가 막혀버린 물고기와 같은,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엄청난 '결함'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어쩌다 이런 치명적인 약점을 갖게 된 걸까요?
이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우리는 수천만 년 전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우리 유전자(DNA) 속에 숨겨진 '범죄의 현장'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은 인류의 조상이 겪었던 '진화의 배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 범인은 DNA 안에 있다: GULO 유전자의 비극 🧬
동물들이 포도당을 원료로 비타민 C를 만드는 과정은 여러 단계의 화학 반응으로 이루어집니다. 그중 마지막 단계, 즉 최종적으로 비타민 C를 완성시키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GULO(L-gulonolactone oxidase)'라는 이름의 효소입니다.
우리 인간의 DNA 속에도 이 GULO 효소를 만드는 '설계도', 즉 GULO 유전자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약 6천만 년 전, 인류의 먼 조상에게서 이 유전자에 치명적인 '오타(돌연변이)'가 발생했습니다. 이 오타 때문에 설계도는 완전히 망가져 버렸고, 우리 몸은 더 이상 GULO 효소를 만들어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망가진 설계도는 후손에게 그대로 유전되었죠.
과학자들은 이렇게 흔적만 남아 작동하지 않는 유전자를 '위유전자(Pseudogene)', 즉 '가짜 유전자'라고 부릅니다. 우리에게 GULO 유전자는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비타민 C 공장의 마지막 기계를 만드는 설계도이지만, 찢어지고 얼룩져서 아무도 읽을 수 없는 종잇조각일 뿐이죠.
2. 진화의 배신은 어떻게 일어났나? (풍요의 역설) 🌴
여기서 진짜 미스터리가 시작됩니다. 생존에 필수적인 유전자가 망가졌다면, 그 돌연변이를 가진 개체는 도태되고 사라지는 것이 자연선택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의 조상은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번성하여 우리에게까지 이 '결함 있는' 유전자를 물려준 걸까요?
해답은 바로 당시 조상들이 살았던 '환경'에 있었습니다.
어떤 마을에 매일 아침, 신선하고 맛있는 빵이 공짜로 무한정 배달된다고 상상해봅시다. 그 마을의 유일한 빵집 주인은 어떻게 될까요? 처음에는 빵을 만들겠지만, 곧 빵을 만드는 것이 에너지 낭비라는 것을 깨닫고 가게 문을 닫을 겁니다.
세월이 흘러 빵집 주인은 빵 만드는 법(유전자)을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그래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어차피 매일 공짜 빵(먹이)이 배달되니까요. 하지만 어느 날, 이 가족이 공짜 빵이 없는 다른 마을로 이사를 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들은 빵을 만들지 못해 굶주리게 될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GULO 유전자가 망가졌던 시기의 우리 조상들은 열대 우림 지역에서 살았습니다. 그곳은 비타민 C가 풍부한 과일과 식물들로 가득 찬 '공짜 빵이 넘쳐나는 마을'이었죠. 매일 식사를 통해 엄청난 양의 비타민 C를 섭취했기 때문에, 굳이 에너지를 써가며 비타민 C 공장을 돌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GULO 유전자가 망가져도 생존에 아무런 불이익이 없었던 겁니다.
오히려 비타민 C 합성 과정에서 생기는 부산물인 과산화수소(활성산소의 일종)를 만들지 않게 되어, 불필요한 산화 스트레스를 줄이는 이득이 있었을 것이라는 가설도 있습니다.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생존 스킬의 '삭제'는 버그가 아니라 오히려 '업그레이드'였을지도 모릅니다.
3. 결론: 풍요가 남긴 상처 💔
결국 인류가 비타민 C 합성 능력을 잃어버린 것은 '진화의 배신'이라기보다는 '환경에 대한 완벽한 적응'의 결과였습니다. 불필요한 기능은 과감히 삭제하여 에너지를 아끼는, 지극히 효율적인 선택이었죠.
문제는 인류가 그 '풍요의 에덴동산'을 떠나 전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비타민 C가 부족한 곡물을 주식으로 삼고, 오랜 기간 항해를 떠나면서, 과거에는 아무 문제도 아니었던 '망가진 유전자'가 괴혈병이라는 끔찍한 재앙을 불러오는 '원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DNA에 새겨진 이 상처는, 우리의 생존이 우리가 무엇을 먹고 어떤 환경에 사는지와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유전적 약점을 이해하고, 의식적으로 '외부의 빵'을 찾아 먹어야만 하는 운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중요한 비타민이 부족하면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반대로, 너무 많이 먹으면 괜찮을까요? 다음 글에서는 비타민의 양면성, 즉 결핍과 과잉의 세계를 탐험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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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GULO 유전자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인류의 '결함'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환경에 적응한 '효율적인 선택'의 결과라고 생각하시나요? 여러분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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